韓語(yǔ)閱讀:韓國(guó)的傳記《世宗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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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丙燾
    우리 나라의 역사를 읽어 보면, 위대한 인물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세중대왕은 그 빛나는 업적이 후세에 길이 남을 걸출한 임금이다. 그러므로 대왕의 성품과 업적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것은 퍽 뜻있는 일이라 하겠다.
    나는 제군들의 훌륭한 성장을 바라는 뜻에서, 대왕의 훌륭한 성품과, 주로 우리 문화의 창조에 기응한 대왕의 공업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대왕은 1397年에 태중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났고, 1419年에 왕위에 오르니, 나이 스물둘이었다. 그 때 대왕은, 그 용모의 우아함과 자질의 총명함이며 古今에 통달함과 강유를 겸비한 덕으로 하여 衆(zhòng)望의 초점이었다.
    그러나 대왕이 중망의 초점이 됨이나 빛나는 업적을 이룩함이 모두 우연이 아니니, 우리는 대왕의 뛰어난 성품을 알아야겠다.
    대왕은 열성과 근면과 사색의 인간이었다. 일찍이 글을 읽음에 백 번을 거듭하고, 어떤 고전은 다시 백 번을 더하였다 하거니와, 병환 중에서도 독서를 폐하는 일이 없었다. 太宗은 대왕을 世子로 삼을 때, "忠寧은 천성이 총명하고 호학불권하여, 모진 추위와 무더위에도 밤을 밝혀 독서하니, 손에서 책이 떠날 새가 없다." 했으며, 대왕 자신도 "내가 궁중에서 팔짱을 끼고 한가로이 앉아 있던 적이 없다." 했다.
    대왕은 비단 자신의 수학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매일에 다 그러했으니, 날마다 인시에 일어나 平明에 群臣의 朝會(huì)를 받았던 것 하나만으로 이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대왕은 세심한 분이었다. 훈민정음을 만들고도 실험을 거친 연후에야 반포한 일은, 대왕의 세심함이 어떠했던가 함을 잘 나타내 주는 예라 하겠다.
    樸堧(박연)이 경을 만들었을 때의 일이다. 대왕은 중국의 경과 새 경의 소리를 비교해 듣고,
    "중국의 경은 맞지 아니하되, 새 경은 바르고 소리도 청미하다. 다만, 한 군데의 소리가 맞지 아니함은 무슨 까닭인가?"
    했다. 樸堧(박연)이 곧 경을 살펴보니, 먹줄 친 데까지 완전히 다 갈리지 아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에 그 돌을 갈아 먹줄을 없애니, 소리가 비로서 맞았다. 음악에 대한 대왕의 소양도 소양이려 니와, 그 세심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大王은 또 옳다고 믿는 바는 과감히 실천하는 분이었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는 극렬한 상서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성, 반포한 일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므로 대왕의 영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루한 선비들은 때때로 큰 벌을 받기도 했다.
    大王은 과감한 실천력과 함께 따뜻한 사랑을 지닌 분이었다. 밤깊도록 집현전에서 공부를 하다 잠든 학사를 보면, 친히 어의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니, 그 사랑의 어떠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대왕은 특히 百性에 대한 사랑이 두터웠으니,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를 살펴보거나,
    "우리 나라 백성 중에 어찌 곤궁한 사람이 없겠느냐? 내가 궁중에서 자란 까닭으로 백성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
    "자손들이 궁중에서 자라나 종사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니 가탄할 일이다."